사육신의 시조
원래 ‘사육신’이라는 말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여섯 사람으로 알려졌다. 사육신은 당시에는 역적으로 취급되었으나 성종 때에 이르러 재평가되었고 숙종 대에 사육신의 관직이 회복되고 ‘민절(愍節)’이라는 賜額이 내려져 노량진 묘소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 노량진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만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 사육신 묘역 성화 서업 대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를 추가하여 무덤은 7기로 늘었다. 사육신에 김문기가 추가된 것은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는데 김문기는 거사 당시 궁궐 밖에서 군사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아 모의 과정에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칠신’으로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
아무튼 김문기를 제외한 사육신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어서 소개한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
창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 타는 줄 모르는도다 -이개-
客散門扃하고 風微月落할제
酒甕을 다시 열고 詩句 흣부러니
아마도 山人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하위지-
(客散門扃; 손님들이 가고 나서 문을 잠그다, 酒甕; 술독)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차단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초당에 일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 했더니
문전의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와라. -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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